[비즈한국] 또 여름이다. 현실에선 습도가 높아 몸이 축축 처지는 후텁지근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원래 우리의 이상적인 여름은 쨍한 햇볕 아래 물장난을 치는 싱그러운 이미지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의 여름이 그리워질 때면 으레 생각나는 드라마가 2007년 방영한 ‘커피프린스 1호점’.
“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로 시작되는 더 멜로디의 경쾌한 노래 ‘랄랄라 it's love’와 함께 드라마를 보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아, 여름이 원래 저런 이미지였지. 아, 청춘은 저렇게 싱그러운 거였지. 아, 저런 꽁냥꽁냥거리는 연애 하고 싶네.
‘커피프린스 1호점’(커프)이 다루는 기본 설정은 기존 드라마, 순정만화, 인터넷소설에서 많이 봐왔던 것들이다. 남장여자, 재벌 3세와의 사랑, 계약 애인, 출생의 비밀, 사각관계 같은 것. 가난하지만 씩씩한 고은찬(윤은혜)은 평소 보이시한 스타일로 남자로 자주 오해를 받는데, 집안의 강요되는 맞선을 피하려던 재벌 3세 최한결(공유)과 우연히 얽히면서 동성애자인 척 계약 애인 행세를 해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그런 와중 은찬이 우유배달하며 친해진 한결의 사촌형 최한성(이선균)은 자신을 떠났다가 돌아온 한유주(채정안)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어느새 은찬에게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은찬을 철석같이 남자로 알고 남동생처럼 귀여워하던 한결 또한 은찬과 미묘한 기류에 휩싸이는데….
이렇듯 익숙한 설정이지만 ‘커프’는 전혀 올드하지 않다. 방영 당시에도 트렌디했고, 12년이 지난 지금도 촌스럽지 않다. 유튜브에 업로드된 ‘커프’ 영상에 매년 연례행사처럼 ‘커프’를 ‘정주행’하는 사람들의 댓글이 여전히 끊이지 않는 걸 보라. 왤까? 왜 우리는 12년이 지나고도, 중년을 맞이하고도, 광대가 승천한 채로 은찬과 한결의 ‘꽁냥질’을 보면서 아련한 추억에 젖는 것이냐.
먼저 ‘커프’는 세련되게 여심을 사로잡는 법을 안다. 남장여자라는 설정 자체가 순정만화깨나 본 이들의 마음을 홀리기에 충분한 데다(‘베르사유의 장미’의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를 좋아하며 자란 소녀들이 얼마나 많던가!) MBC 드라마국 최초의 여성 PD인 이윤정 PD의 세심한 연출이 더해지며 다 자란 성인 여성들의 가슴을 콩닥콩닥 떨리게 만들었다.
앞서 언급한 더 멜로디의 음악을 비롯해 허밍어반스테레오, 티어라이너, 캐스커 등 감각적인 인디밴드 음악들을 잘 활용한 것은 물론, 안 그래도 매력 넘치는 공유와 이선균을 직접 노래 부르게 해 여성 시청자들의 눈을 하트로 변하게 만들었다(노래 불러주는 남친이라니! 그게 공유와 이선균이라니!). 특히 한성이 유주에게 휴대폰을 통해 불러주던 ‘바다여행’은 이선균 특유의 목소리가 달콤한 멜로디와 어우러지며 벨소리 다운로드 1위, 미니홈피 배경음악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선풍적인 사랑을 받은 바 있다.
각 캐릭터의 매력뿐 아니라 캐릭터의 패션, 드라마의 배경과 등장 소품까지 모두 팬시(fancy)한 맛이 있었다. ‘내 이름은 김삼순’의 유희진(정려원)과 더불어 드라마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서브녀라 불리는 캐릭터 한유주는 존재 자체가 팬시했다. 채정안의 리즈 시절로 불리는 고급스럽고 화사한 외모에, 지금 봐도 세련 그 자체인 패션에, 오래된 연인에게 먼저 무릎 꿇고 청혼하는 멋진 성격까지 삼박자가 어우러져 여주인공 인기를 넘보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것.
한결과 한성의 집도 너무너무 팬시했다. 부암동 어느 고즈넉한 단독주택을 배경으로 한 한성의 집은 북한산이 시원스레 펼쳐지는 뷰와 함께 잔디 깔린 마당과 평상 역할을 하던 넓직한 바위마저 갖고 싶게 만들었고,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옥상에 세트로 지은 한결의 집은 남산타워가 정면으로 보이는 데크가 깔린 옥상이 부러웠다.
뚜껑 열리는 차라며 은찬이 방방 뛰며 즐거워하던 한결의 미니쿠퍼 컨버터블과 당시 정식 수입도 되지 않았던 한성의 큐브도 눈길을 끈 것은 물론이다. 소품 하나하나, 디테일 하나하나 모든 것이 캐릭터와 맞물리며 사랑스럽고 귀여웠달까.
물론 가장 큰 인기 요인은 배우들이다. 지금껏 배우들의 대표작에서 ‘커프’가 빠지지 않을 정도로 맞춤옷을 입은 듯 배우와 역할의 시너지가 팽창한 작품이 ‘커프’다. 결코 연기를 잘한다고는 할 수 없는 윤은혜가 더없이 은찬 그 자체로 보였고, 스물아홉 살이던 공유는 20대 끝자락에서 불안정한 청년과 어른 사이의 경계를 헤매던 한결의 어설픔과 싱그러움을 잘 표현했다. 한유주 역의 채정안은 말했다시피 그야말로 전성기였고, 오래된 연인 앞에서 은찬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던 한성 역시 이선균이 맡아 너무나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사실 로맨스물로서의 텐션은 10화 말미, 한결이 은찬에게 “잘 들어. 너 좋아해. 네가 남자건 외계인이건 이제 상관 안 해. 정리하는 거 힘들어서 못해 먹겠으니까 가보자, 갈 때까지. 한 번 가보자”라는 명대사를 뱉으며 키스를 퍼부을 때가 최고조였다. 20대였던 당시에는 10화 이후 벌어지는 이야기가 다소 루즈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이 드라마를 다시 보면 커밍아웃 이후의 이야기가 제법 멋지게 다가온다. 사랑과 정직 사이의 상관관계, 사랑과 자립 사이의 상관관계, 연인에게 결혼의 의미, 입양의 새로운 이미지 등 20대 당시에는 채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띄고 곱씹는 재미가 있다. 물론 다 떠나서 죽은 연애세포도 살려내는 달달한 감정만으로도 ‘커프’는 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오글거려서 손가락이 곱아버릴 것 같지만 광대는 승천하고,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돌고래 소리를 내게 만드는 풋풋하고 달달한 애정신들은 여전히 힘이 세다.
거기다 ‘프린스’들이라 불리던 카페 커피프린스의 진하림(김동욱), 노선기(김재욱), 황민엽(이언)과 함께 뜨거운 햇볕 아래 땀 흘리며 농구를 하고, MT를 떠나 물장구를 치고, 각종 타악기를 두들기며 여름밤의 공연을 펼치는 모습을 보면 흘러가버린 내 청춘을 아련히 되짚어보게 된다. 아, 옛날이여! 어쩌겠나.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드라마는 리바이벌할 수 있으니 그저 여름이면 ‘커프’를 보며 옛날을 추억할 밖에.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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