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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의 계정공유] 가벼운 호의가 낳은 끔찍한 스토킹의 실체, '베이비 레인디어'

작가 겸 주연배우의 실화 다룬 잔혹극…메일, 스마트폰 더해진 21세기판 '미저리'

2024.05.03(Fri) 15:31:12

[비즈한국] 차 한 잔이 시작이었다. 코미디언을 꿈꾸는 바텐더 도니(리처드 개드)는 술집에 혼자 들어온 중년 여성 마사(제시카 거닝)를 보자마자 연민을 느낀다. 거구에 추레한 옷차림의 마사는 음료를 주문할 돈도 없다고 한다. 도니는 마사에게 차 한 잔을 산다. 도니가 아닌 누구라도 그랬을 수 있다. 문제는 그 가벼운 연민과 호의가, 내 인생을 지옥처럼 느끼게 만드는 끔찍한 결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거구에 꾸미지 않은 추레한 옷차림, 갈 곳 잃은 허망한 눈빛. 보기만 해도 연민을 자아내는 마사에게 도니는 차 한 잔의 호의를 베푼다. 그리고 시작된 마사의 관심을 도니는 은근히 즐기는데, 그 인정욕구는 그의 삶을 바닥으로 끌어내리게 된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지난 4월 11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베이비 레인디어’는 플릭스패트롤 집계 기준 2024년 16주차와 17주차, 2주 연속 넷플릭스 TV 부문 글로벌 1위를 기록했다. 작가이자 주연배우를 맡은 리처드 개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점이 화제를 모았는데, 실제로 4년 넘는 시간 동안 받은 이메일만 4만 1071통에 음성메일이 350시간에 달한다고 한다. 리처드 개드는 자신의 경험을 1인극 연극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렸고, 이는 다시 넷플릭스에서 7부작 시리즈로 만들어졌다. ‘베이비 레인디어’는 편당 30분 남짓의 짧은 러닝타임이지만 단숨에 볼 수 있을 만큼 녹록한 작품은 아니다.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을 지켜보는 감정의 노고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벗어나고자 집착적으로 데이트 앱에서 사람을 만나는 도니. 그러다 만난 트랜스 여성 테리는 도니에게 구원이 될 뻔 하지만, 극복하지 못한 과거는 계속해서 도니의 발목을 잡는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마사는 가벼운 호의를 베푼 도니에게 무서울 정도로 집착한다. 스스로 잘나가는 변호사라고 말하지만 누가 봐도 거짓말이다. 매일 도니가 일하는 술집에 와서 무료로 제로 콜라를 마시며 여러 시간 동안 도니와 시시답잖은 수다를 즐기기 때문이다. 마사는 도니를 ‘아기 순록(Baby Reindeer)라 부르며, 검색을 통해 알아낸 이메일 주소로 하루에도 수십 통씩 음란한 내용의 이메일을 투척한다. 피처폰을 쓰면서 굳이 ‘sent from my iphone’이라고 쓰면서. 마사의 집착이 점점 폭주하게 되는 것엔 도니의 책임도 있어 뵌다. 도니는 시청자들이 “도대체 왜?”라고 부르짖을 만큼 약 6개월 동안이나 마사의 행동을 단호하게 끊어내지 못한다. 그렇지 않아도 남성 가해자-여성 피해자의 프레임을 바꾼 남성 피해자-여성 가해자라 사회 통념상 그 심각성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데도. 아마 도니 스스로도 그 사회 통념에서 무관하지 않았던 것도 있을 것이다.

 

마사가 도니를 끊임없이 ‘아기 순록’이라 부르는 이유가 극 말미에 나오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드라마는 ‘마사가 왜 스토커가 되었나’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사 역시 공적 시스템의 관리 내지는 보호가 필요한 환자임은 분명하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도니가 마사의 폭주를 끊어내지 못한 것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건 도니가 무의식적으로 마사의 관심과 집착을 갈구한 데 있다.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싶은 도니는, 그러나 무대에서 결코 호응을 얻은 적이 없다. 그런 그에게 마사의 관심과 집착은, 그것이 비정상적임을 느끼면서도 어느 정도 설렜을 것이다. 게다가 4화에서 밝혀지지만 도니에겐 바닥까지 떨어진 자존감을 더 끌어내렸던 과거의 트라우마가 있다.

 

자신에게 코미디에 재능이 있다고 추켜세우던 성공한 남성 작가로부터 마약을 권유받으며 성폭력을 당했지만, 그럼에도 그 인정욕구에 취해 스스로 그에게 갔었던 경험. 자기혐오와 인정욕구가 결합되면서 자신을 더욱 수렁으로 밀어 넣었던 도니의 경험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마사를 모질게 끊어내지 못한다. 마사의 집착이 도니의 여자친구를 폭행하고, 전 여자친구를 협박하며, 심지어 스코틀랜드에 사는 도니의 부모에게까지 협박하는 지경에 이르며 겨우 도니는 현실을 마주하고 자신의 문제 또한 들여다보게 된다.

 

도니는 과연 마사에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보다, 왜 도니는 마사와의 관계를 그토록 끊어내지 못한 걸까? ‘베이비 레인디어’는 스토커와 피해자 사이 일어나는 사건보다 그들, 특히 피해자 도니의 심리에 주목한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오프라인에서 벌이는 마사의 스토킹도 끔찍하지만, 드라마는 마사가 도니에게 보내는 이메일 내용을 수시로 보여주면서 21세기형 스토킹의 무서움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며 관객의 몰입을 돋운다. 주연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도 이 드라마를 보는 묘미. 제시카 거닝이 연기한 마사는 연민을 부르는 추레한 모습부터 광기에 사로잡힌 모습까지, 캐시 베이츠가 연기했던 ‘미저리’의 애니와는 또 다른 형태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스토커를 완성해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그를 직접 연기까지 한 리처드 개드의 연기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시청해 보시라.

 

스토커와 피해자 사이 일어나는 일을 무시무시하게 그려내는 스릴러를 원한다면 ‘베이비 레인디어’는 적합한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베이비 레인디어’는 공작새처럼 저마다 뽐내기 좋아하는 현대사회에서 짓눌려 있는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 관계에 대해 곱씹어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러닝타임은 짧지만 여운은 짧지 않다. 단, 감정의 노고가 상당하다는 점을 기억하길.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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