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K팝은 대한민국 최고의 수출품이 됐다. 그러나 화려함 뒤에는 그늘도 깊다. K팝의 상징인 아이돌은 이른 나이에 발탁돼 혹독한 연습생 시절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노동권과 인권은 무시되기 일쑤다. 데뷔조차 못 한 무수한 연습생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비즈한국은 ‘K팝: 이상한 나라의 아이돌’ 시리즈를 통해 K팝이 성장하는 동안 외면했던 문제점을 짚고, 다각도로 대안을 살펴보고자 한다. K팝을 만드는 이들이 건강해져야 K팝을 즐기는 사람들도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K팝 스타의 삶은 다른 가수와는 조금 다르다. 오히려 올림픽 체조선수에 더 가깝다(The life of a K-POP star is a little different from other artists. It’s more close to an Olympic gymnast).”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대표가 미국에서 오디션을 진행하면서 한 말이다. K팝 시스템에 대한 미국의 비판 여론을 의식해서였을까. 그는 K팝 아이돌을 엘리트 체육으로 대표되는 ‘올림픽 체조선수’에 비교했다. 아이돌은 여느 가수와 ‘다르다’는 것이다.
K팝은 이미 미국에서 성공했다. 방탄소년단이 앨범을 내면 빌보드 1위를 차지한다. 블랙핑크, 에이티즈, 스트레이키즈 등 그룹도 빌보드와 스포티파이를 ‘국내 차트’처럼 오르내린다. 이제 기획사들은 아이돌 수출을 넘어 ‘K팝 육성 시스템’을 수출하고 있다. 아시아를 접수한 국내 대형 엔터사들은 ‘미국’으로 눈을 돌렸다. JYP는 걸그룹 VCHA(비챠)를, 하이브는 걸그룹 캣츠아이를 실험적으로 제작했다.
“오래전부터 K팝의 방법론에 기반해서 다양한 국가 출신의 인재들을 육성하고, 이들과 함께 K팝 스타일의 글로벌 그룹을 만들고 싶었다.” 지난해 8월 미국 현지 걸그룹 프로젝트 ‘더 데뷔: 드림아카데미’와 관련한 기자 간담회에서 방시혁 하이브 의장이 한 발언이다. 프로젝트 대표인 미트라 다랍 씨도 “(프로젝트의 육성 프로그램은 전통적인 K팝 아이돌 시스템과) 다르지 않다. T&D(Training & Development) 시스템은 K팝 핵심 방법론의 하나로, 이것을 미국으로 가지고와 접목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아이돌 수출과 아이돌을 키우는 ‘시스템’ 수출은 다른 문제다. 특히 K팝 육성 시스템이 ‘가혹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미국에서 한국과 동일한 시스템을 정착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이브의 바람대로 미국에서 연습생을 만들고 아이돌을 제작할 수 있을까? 미국인은 K팝 육성 시스템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저칼로리 젤리 먹으며 살 빼는 ‘열 살’ 아이들
2005년생 로렌(Lauren)은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한국 교포지만, 한국어를 따로 배우진 않았다. 들으면 일부 알아듣지만, 말은 잘 못 한다.
“자라는 동안 엄마가 항상 K팝을 들려줬어요. 제가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아마도 중학교 1학년쯤이었을 거예요. BTS가 인기를 끌던 시기였어요. 어렸을 때부터 저는 연극을 좋아하고, 노래하는 것도 좋아하고, 춤추는 것도 좋아했어요.”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한국계 미국인이지만, 사실 나는 스스로를 미국인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어는 잘 못하고, 미국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미국적인 도덕과 가치를 많이 배웠어요. 다만 엄마 덕에 다른 미국 친구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뉴저지에 사는 로렌에게는 ‘브로드웨이’가 코앞이었지만, 뮤지컬 배우를 꿈꾸진 못했다. “브로드웨이나 뉴욕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백인입니다. 그런데 무대에서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면서 저도 시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학교 3학년이 된 2018년, 로렌은 한국에 가기로 결정했다. ‘K팝 아이돌’이 되기 위해서다. “저는 백인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에 가야 기회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한국의 트레이닝 문화나 아이돌 문화를 직접 경험하고 싶었어요.”
로렌은 1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아이돌 트레이닝 전문 학원에 다녔다. 로렌의 부모님은 학원비로 2만 달러(약 2670만 원)를 지불했다. 로렌은 당시 학원 분위기를 이렇게 회상한다.
“전체적으로 압박감이 있었어요. 특히 체중이나 외모에 대한 압박이 심했죠. 아이들이 체중 감량을 위해 식사를 거르거나 물을 마시지 않는다고 했어요. 오디션장 입구에는 체중계가 있었고, 오디션에서 체중과 키를 묻기도 하고요. 저는 2005년생인데, 2010년생들도 많았어요. 당시 열 살 정도 아이들이죠. 그런 어린아이들이 50kcal 젤리를 먹으면서 다이어트를 하는 것도 봤어요.”
“미국에서는 성형수술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한국에서는 성형수술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도 놀라웠어요. 외모는 바꿀 수 없지만, 한국에서는 아니었죠. 다행히 저는 한국말을 못 하는 ‘외국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런 압박에서는 다른 한국 친구들보다는 자유로운 편이었습니다.”
로렌은 매일 댄스와 보컬 연습을 했다. 15세의 로렌과 10~11세 학원 친구들은 레슨이 끝난 후에도 연습실에 남았다. 연습실에 오래 남아서 연습해야만 아이돌이 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조성돼 있었다. 집에 오는 시간은 밤 11시. 함께 한국에 온 로렌의 어머니는 매일 로렌과 늦은 저녁을 먹었다. “엄마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함께 저녁을 먹고 점심은 몰래 굶었어요. 저는 마른 체형이었는데도 다이어트 압박이 계속 있었어요. 정신적으로도 스트레스가 컸습니다.”
#한국식 압박 시스템, 미국에서 받아들여질까
로렌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바로 ‘어린 나이’에 대한 집착이었다. “왜 이렇게 어린 나이에 시작하는지 이해가 안 갔어요. 아마도 더 이상적인 체형으로 만들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어린아이들은 더 쉽게 조정할 수 있어서일 수 있죠. 나이가 어릴수록 더 유리했고, 저는 나이가 많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미국에서는 그런 압박을 받은 일이 없어요. 학교에서도 특정 기준이나 고정관념에 맞추라는 압박을 받지 않았어요. 한국에서는 그런 압박을 강하게 느꼈어요.”
1년 후 로렌은 ‘아이돌’의 꿈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다시 공부해 뉴저지에 있는 럿거스대학교(Rutgers University) 약학대학에 합격했다. 로렌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보다 ‘K팝 아이돌’이 되는 게 더 힘들다고 말한다. 아이돌이 되는 건 노력과는 무관한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것보다 K팝 연습생이 되는 과정이 훨씬 더 어렵다고 생각해요. 학교에서는 공부하면 결과가 나오지만, K팝에서 중시하는 외모나 나이 같은 변수는 내가 바꾸기 힘들거든요. 시간적인 압박도 크고, 데뷔할 기회도 제한적이고요.”
로렌은 한국에서의 경험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어린 친구들을 걱정했다. “많은 친구들이 연습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거나, 학교를 다니면서도 교육에는 신경 쓰지 않고 연습과 오디션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죠. 아이돌이 못 됐을 때는 대처할 방법이 없어요.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으니 다른 직업을 찾기 어렵죠. 아이들이 인생을 완전히 낭비하지 않도록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미국에 K팝 육성 시스템이 도입될 수 있겠냐는 질문에 로렌은 이렇게 답했다. “(한국에 올 때) 그 생활이 힘들 거라고 각오했는데도 생각보다 더 어려웠습니다. 신체적인 어려움뿐 아니라 정신적 압박이 정말 심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정신 건강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 못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정신 건강에 대한 인식이 높고, 이런 문제엔 즉시 반응을 보이죠. 미국에 시스템이 수출되면 미국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사실 궁금합니다.”
※다음 편에는 아이돌 지망생 트레이닝 학원의 실태에 대한 기사가 이어집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전다현 기자
allhyeon@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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