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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의 계정공유] 거짓말을 멈출 수 없다면 '화이트 라이'를 보라

거짓 암 환자 행세로 돈도 얻고 사랑도 얻는 여대생…거짓말의 이유는 보여주지 않아

2021.02.19(Fri) 16:35:31

[비즈한국]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을 한다. 의도적인 거짓말도 있고, 관성적이거나 관례적인 거짓말도 있고, 공상과 망상 사이를 헤매는 거짓말도 있고, 선의의 거짓말도 있다. 문제는 거짓말의 정도, 그러니까 선을 넘느냐 아니냐일 것이다. 왓챠에서 독점으로 공개하는 ‘왓챠 익스클루시브(WATCHA EXCLUSIVE)’에서 발견한 영화 ‘화이트 라이’는 제목부터 선의의 거짓말을 표방한다.

 

왓챠에서 독점으로 공개하는 ‘왓챠 익스클루시브’에서 발견한 영화 ‘화이트 라이’는 제목부터 선의의 거짓말을 표방한다. 사진=영화 포스터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제목이 반어적임을 알게 된다. 제목부터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캐나다 온타리오의 학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하는 케이티 아너슨(케이시 롤)은 교내 유명인사. 파르스름한 민머리로 교정을 활보하는 그는 희귀 흑색종을 앓고 있는 암 환자로, 시애틀에서 신기술 면역요법 치료를 받기 위해 온라인 모금과 자선행사를 벌이고 있다. 곁에서 케이티를 따스하게 응원해주는 동성 연인인 제니퍼도 있고 친구들의 응원과 기부도 잇따르며, 학교 측에서도 케이티의 처지를 고려해 재단 장학금에 연결해주려고 한다.

 

문제는 케이티가 암 환자가 아니란 것이다. 영화 초반, 거울을 보며 능숙하게 머리를 면도하는 케이티의 모습에서부터 관객은 그녀가 암 환자가 아니란 걸 안다. 거짓말 덕분에 월세도 해결하고, 연인의 사랑도 얻는 케이티에게 문제가 생긴다. 재단 장학금을 받기 위해 당장 이번 주 안에 진료기록이 필요해진 것. 어렵게 기록을 만들어줄 사람을 찾았지만 수고비로 줄 2000달러를 구하기가 요원하다. 사이가 좋지 않은 아버지를 찾아가 부탁하지만 그는 케이티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꿰뚫어 보고 진실을 털어놓기를 권할 뿐이고.

 

캘빈 토머스와 요나 루이스 감독이 연출하고 케이시 롤이 주연을 맡은 캐나다 영화 ‘화이트 라이’.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다. 사진=영화 스틸컷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 그리고 완벽하게 설계된 거짓말도 어디선가 허점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미 고전 ‘태양은 가득히’에서 찬란한 태양 아래 톰 리플리의 거짓말이 산산조각 나는 걸 본 적이 있다. 하물며 케이티 정도의 허접한 거짓말이면 오죽하랴. 가짜 진료기록을 만들어주는 수련의가 케이티의 거짓 정보를 물을 때 그 빈약함이 드러난다. 어떤 종류의 흑생종인지 모르고, 적절한 항암치료의 간격도 항암치료의 후유증도 모른다. 게다가 모래성처럼 툭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법한 그 거짓말을 정기적으로 약을 제공하는 공급책과 공급책이 연결해준 진료기록 위조를 위한 수련의, 그리고 아버지가 안다.

 

케이티의 거짓말이 범죄에 준하는 수준이 되자(거짓으로 남에게 갈취한 돈이 5000달러 이상이면 징역행이란다) 아버지는 딸의 온라인 모금 사이트에 딸의 거짓을 폭로하는 글을 올린다. 강제적이긴 하지만 이때 케이티는 거짓말을 끊을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오랜 시간 거짓말을 영위한 사람들에게 시작된 거짓말은 멈출 수 없다. 한 번 구르기 시작한 거짓말을 자의로 끝내기란 목숨줄 끊기 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한계에 다다른 거짓말쟁이들은 일격의 폭로에 무너지거나 그 직전에 스스로를 해하거나 혹은 조용히 사라지고 만다. 모든 거짓말이 발각되고도 멀쩡하게 일상을 영위한다면, 그는 자신조차 속이는 완성형 거짓말쟁이가 된 것일 테다.

 

캐나다 맥마스터대학에서 무용을 전공 중인 케이티는 희귀 흑색종을 앓고 있다고 알려져 교내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사진=영화 스틸컷


케이티는 어떤가. 아버지의 글로 모든 사람이 그에게 의문을 품지만 굴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고소하겠다며 변호사를 찾고, 진료기록 정도가 아니라 아예 치료 과정 자체를 거짓으로 꾸며줄 수 있는 의사를 만난다. 이 거짓 논란을 방송으로 다뤄줄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응한다. 끝까지 케이티를 믿어주고자 하는 연인 제니퍼에게도 진실을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영화 엔딩 신에서 라디오 부스에 들어가 뭐라 뭐라 이야기하는 케이티의 모습을 비추는데, 그때도 아마 자신의 거짓말을 관철하기 위한 다른 거짓말을 하고 있지 싶다. 거짓으로 위태위태하던 케이티는 마지막 순간 한결 단단해 보이는 표정으로 방송에 임한다. 그의 거짓 인생이 업그레이드될 모양이다.

 

재미난 건 케이티의 거짓말을 대하는 영화의 태도다. 케이티는 왜 거짓말을 할까? ‘화이트 라이’는 케이티가 왜 거짓말을 시작했는지 그 이유를 일절 설명하지 않는다. 고등학생 시절 어머니가 자살로 세상을 뜨고 난 후 아프다는 거짓말로 결석을 하며 관심을 끈 적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것이 시초가 됐을지도 모르지만 영화는 그를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 기부로 받은 돈을 월세 등 필요한 곳에 쓰긴 하지만 돈 때문에 시작한 거짓말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동성 연인을 포함한 친구들, 주변인들의 관심과 응원으로 거짓말을 증폭시켜온 것은 가늠할 수 있다. 다만 짐작만 할 뿐, 영화는 ​그저 ​거짓말하는 케이티의 상황을 건조하게 쫓는다.

 

동성 연인 제니퍼도 속일 만큼 자신의 거짓말에 몰두한 케이티. 영화는 그 거짓말의 원인을 설명하지 않고 관객에게 생각해보게 만든다. 사진=영화 스틸컷


의외로 내 시선을 잡아끈 건 영화 말미, 케이티의 치료 과정 자체를 거짓으로 꾸며줄 수 있다던 의사였다. 아주 건조하게, 케이티의 어떤 거짓말에도 놀라지 않으며 케이티의 거짓에 침묵하는 대가, 진단서와 기록 일체를 만들어주는 대사, 거짓 치료 과정으로 만날 때마다 대가를 숫자로 환산해 기계적으로 읊던 그 의사야말로 완성형 거짓말쟁이의 표본으로 보인다.

 

거짓말쟁이 케이티의 말로가 어떻게 될진 모르겠다. 거짓이 만천하에 드러나도 그 거짓을 바탕으로 돈을 벌기도 하는 세상이니 어쩌면 경제적으로는 나아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를 믿었던 제니퍼는 떠나갈 것이다. 케이티를 지지하지 않지만 그가 취해 있는 그 거짓의 달콤함이 어떤 건지는 안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 거짓말이 상대에게 먹히고 그로 인해 다른 리듬을 자아낼 때의 이상한 성취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짜릿하다. 성인이 되어서도 종종 거짓말을 즐긴 나는 그 거짓의 세계를 끊을 수 없는 케이티의 마음이 십분 이해된다. 물론 그걸 지속했다면 지금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기 어려웠겠지만.

 

곧 만천하에 드러날 지경인 자신의 거짓말을 완성시키기 위해 케이티는 또 다른 거짓말쟁이를 찾아간다. 사진=영화 스틸컷


사소한 거짓말을 끊기 어려운 지경이라면 ‘화이트 라이’를 보라. 적어도 영화 말미에 의사가 케이티에게 읊어준, 거짓말을 완성하기 위한 금액을 들으면 정신이 좀 들 것이다. 그 정도 거짓말까지 가진 않을 거라고? 에이, 거짓말 한두 번 해보시나.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처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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