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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책] 낙태죄가 합헌이 된다면? '곤'

낙태 테스트 실시하는 가상의 대한민국 통해 현실 돌아보게 해

2021.01.15(Fri) 17:37:38

[비즈한국] “헌법재판소는 낙태를 처벌하는 현행법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낙태죄가 생긴 1953년 이후 한 번이라도 낙태 수술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 즉 IAT에서 양성 결과를 얻은 여성은 처벌받게 됩니다. 1939년 이후에 태어난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가임기 여성은 모두 IAT를 받아야만 합니다.”

 

‘며느라기’ 수신지 작가의 신작 ‘곤’은 낙태죄가 합헌 결정을 받았다는 설정에서 시작된다. 대한민국 가임기 여성 모두가 인공낙태 테스트 IAT(Induced Abortion Test)를 받아야 하고, 양성 반응이 나오면 1년 동안 수감된다. 

 

전작 ‘며느라기’에서 주인공 민사린이 결혼 이후 겪는 가정 속 가부장 제도를 포착한 작가는 ‘곤’에서 ‘낙태’를 둘러싼 사회의 이중적 잣대를 노민형, 노민아, 노민태 삼남매의 일상을 통해 투명하게 비춰본다. 

 

사진=귤프레스 제공

곤 1·2

수신지 지음, 윤정원·​천지선 감수, 귤프레스

1권 248쪽, 2권 276쪽, 각 권 1만 4800원​​

 

민형은 엄마에게 애를 맡긴 워킹맘이고, 민아는 아이를 낳을 계획이 없는데 임신을 했고, 민태는 스무 살 여자친구 샛별이 임신했다고 알려와 고민에 빠져 있다. 그런데 엄마가 IAT에서 양성 반응이 나온다. 보건소에서 임신중절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애를 지우라던 국가는 이제 그 일로 엄마를 감옥에 보내려고 한다. 더욱이 임신을 혼자 하는 것도 아닌데, 아빠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 

 

“옛날에는 낙태 버스까지 운영하면서 국가가 장려했다던데 뒤통수도 이런 뒤통수가 어디 있어요?”

“우리 아버지는 정관 수술하고 청약 추첨 우선권도 받았다던데요?”

“이건 개인의 일탈이 아니야! 사회 시스템의 문제라고.”

“어쩔 땐 낳아라, 어쩔 때는 낳지 말아라. 진짜 웃겨요!”

 

이 테스트로 부부 사이의 갈등이 늘어나고 이혼율이 증가한다. 미혼 여성은 퇴사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유부녀는 괜찮고 아가씨는 욕먹을 일이에요?”

“장모님은 시스템의 피해자고 채영 씨는 겁도 없는 사람이고?”

“에이, 우리 장모님이랑 비교하면 안 되지. 장모님은 피치 못한 사정이 있어서 하신 거 아닐까?”

 

둘째 민아는 계획에 없던 임신을 중지할지를 두고 고민한다. 민아는 아이를 낳을 경우 자신의 성을 쓰기로 결혼 전에 남편과 약속했는데, 남편 경은 이를 까맣게 잊고 있다. 자기 성을 따르지 않겠다면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민아에게 발끈해 ​경은 ​신고하겠다고 내뱉는다. 

 

“생각해보니 희한하네? 성은 남자가 받고 벌은 여자가 받고?” 

 

캐나다 어학연수를 앞둔 민태는 샛별의 임신 소식에 갈등한다. 아기를 낳자니 미래가 걱정되고, 수술을 받자니 감옥에 가야 한다. 게다가 낙태수술이 음성화되면서 비용은 두 배로 치솟아 어학연수를 포기해야 할 판이다.

 

“나는 휴학하고 아기 낳고 언제 복학할지 모르는 채로 오빠 집에서 살고 오빠는 어학연수 다녀와서 빨리 졸업하고 취직한다고? 오빠는 달라지는 게 없네?”

“너랑 아기랑 먹여 살리려면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해야겠어.”

“왜 왜 나를 먹여 살려? 내가 왜 오빠가 먹여 살려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남성에게는 책임감, 여성에게는 죄책감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낙태’​라는 말, 낙태죄 앞에서 사라지는 아빠의 존재, 여성에게 기울어진 돌봄노동의 무게 등 우리 사회의 현실이 생생한 대사들과 함께 다가온다.

 

낙태죄는 1953년 제정됐고, 2019년 4월 헌법불합치 결정이 났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서 태아의 생명권이 여성의 자기결정권보다 중요하다는 판결이 계속 나왔다. 현재 낙태죄는 2020년 12월 31일까지 법 조항이 개정되지 않아 폐지됐다. 여전히 보수 단체들은 낙태죄 폐지에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헌법불합치를 선고한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폐지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이 각각 집회를 연 모습. 사진=비즈한국 DB

 

낙태죄는 우리 모두와 관계된 일이지만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남성은. 여성이 낙태를 해도 상대 남성은 처벌받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으니까. 노 씨 삼남매의 아버지, 샛별의 아버지, 민형의 남편처럼. 이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착하고 평범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자기가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남들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때때로 ‘고구마’를 안겨주는 이런 인물들 덕분에 수신지 작가의 작품이 더 현실적으로 읽히는 것이리라.​​

 

만화처럼 실제로 낙태 테스트를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 하지만 가임기 여성 지도를 만들고, 가임기 여성만 신혼부부 청약을 할 수 있게 했던 나라인지라, 마냥 웃으며 넘겨지진 않는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낙태에 반대하든 찬성하든, 샛별의 말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저는 어떤 임신중지는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임신 초기일 때, 사회경제적으로 준비되지 않았을 때의 임신중지는 무죄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합법적인 허용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왜 어떤 임신중지는 죄가 맞다고 생각했을까요? 임신중지에 대한 윤리적 판단과 별개로 그것이 ‘국가가 처벌할 일’이 맞는지 의문을 갖지 않았던, 제 생각의 한계를 깨달았던 일이었습니다.”

 

‘곤’은 두 권으로, 1권의 영어제목은 gone, 2권의 영어제목은 ‘go on’이다. 사라졌던(gone) 여성들의 삶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나아간다(go on)는 의미를 담고 있다.​ 

김남희 기자 namhee@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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