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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흥망] 삼성가의 '아픈 역사' 새한그룹

이병철 차남 이창희 설립, 필름산업 사양에 외환위기 겹치며 삼성에 도움 요청했지만…

2020.09.22(Tue) 16:47:56

[비즈한국] 새한그룹​은 삼성가에서 분리해서 나온 그룹 중 유일하게 부도나서 사라졌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할아버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작은아버지였던 고 이재찬 새한미디어 사장은​ 이들에게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하고 그룹이 망한 후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택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새한그룹의 쇠락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새한그룹은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둘째 아들 이창희 씨가 창립했다. 사진=비즈한국 DB


#삼성그룹 ‘왕자의 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1976년 9월 암수술을 받으러 일본으로 떠나기 전 가족회의를 열었다. 이때 그룹 후계자를 장남 이맹희, 차남 이창희를 건너뛰고 셋째 아들인 이건희로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계구도가 이렇게 정해진 이유는 조금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6년 삼성그룹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이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하에 일본 미쓰이그룹에서 사카린 약 55톤을 밀수했다가 적발된다. 이 여파로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공업과 대구대학을 정부에 헌납하고 경영 은퇴를 선언했다.

 

이 밀수는 이맹희 씨가 진두지휘했지만 법적 책임은 둘째 이창희 씨가 지고 감옥에 들어갔다 1년 만에 풀려난다. 장남 이맹희 씨가 삼성그룹을 2년간 이끈 뒤 1968년 이병철 회장이 삼성그룹 경영에 복귀한다. 그런데 이때 이맹희 씨가 이병철 회장에게 밉보이며 후계구도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차남 이창희 씨는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정권 인사와 손잡는다. 이창희 씨는 부정한 일을 저지른 이병철 회장이 그룹에 복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영원히 손을 떼야 한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하는 행위를 오히려 비난하며 탄원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사실을 모두 전해들은 이병철 회장은 크게 분노해 이창희 씨에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귀국하지 말라’며 미국으로 보내버렸다.

 

#새한그룹의 탄생과 성장

 

새한그룹은 1967년 이창희 씨가 미국 마그네틱미디어와 합작해 창업한 마그네틱미디어코리아가 기원이다. 카세트테이프 장사로 시작해 점차 사세를 확장했다. 1977년 새한전자를 인수하고 1979년 마그네틱미디어코리아의 미국 지분을 사들여​ 1980년 새한미디어가 새로이 출범한다. 1985년에는 한국종합화학으로부터 충주 비료공장을 사들여 화학 사업에도 나섰다.

 

1977년 귀국한 이창희 씨는 아버지 이병철 회장을 찾아갔다. 그는 “개인적 비즈니스로 귀국했다. 예전 행동을 뉘우쳤다”고 사과하며 3년간 문안인사를 하는 등 관계를 회복해 나갔다. 이병철 회장은 제일합섬 주식을 이창희 씨 가족에게 물려줬다.

 

1987년 11월 23일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장례식에 참석한 자녀들. 앞줄 오른쪽부터 장남 이맹희, 막내딸 이명희, 삼남 이건희, 차남 이창희. 사진=비즈한국 DB

 

1991년 이창희 회장이 백혈병으로 사망하자 아내 이영자 씨가 회장에 올랐다. 1992년 미국 GMS 사 인수, 새한이동통신을 세워 무선호출기 사업에 진출, 황성통운을 인수해 물류업을 하며 사세를 확장했다. 1995년에는 삼성그룹으로부터 제일합섬을 넘겨받았고, 1997년 새한그룹이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1998년 공정거래위원회는 새한그룹을 대규모기업집단으로 지정했다.

 

1997년 4월 아들 이재관 씨가 34세의 젊은 나이에 부회장으로 취임한다. 그는 그룹의 미래를 화학, 멀티미디어, 건설 건자재 3개 부문을 축으로 생각했으며 무선호출서비스, 방송사업 등 영상 엔터테인먼트 사업 진출도 꿈꿨다. 그는 새한그룹 기술연구소를 용인에 짓고, 100억 원을 들여 새로넷방송을 출범시키며 멀티미디어 사업에 힘을 더했다.

 

#새한그룹의 몰락

 

이재관 부회장은 1997년 자회사인 새한정보시스템을 통해 인터넷 사업에 손대기 시작했다. 몇 년간 쇼핑, 게임 등 신규 사업에 투자를 감행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또 주력사업인 비디오테이프와 섬유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던 1995년부터 필름 사업에 1조 원을 투자하는 패착을 두게 된다.

 

1995년 7170억 원이던 부채는 필름 사업 설비투자가 완료된 1998년 말 1조 7230억 원으로 급증했다. 긍정적이었던 시장의 평가는 1996년부터 돌변했다. 필름 가격 하락과 동시에 경쟁사들이 시설을 증설하거나 시장에 새로이 들어선 것도 모자라 외환위기까지 맞는다. 

 

결국 1조 원을 투입한 필름 사업에서 새한그룹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새한은 일본 도레이에 필름 사업을 6000억 원에 넘겼다. 1996년 6월 이재관 부회장은 늘어난 부채 등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일본 도레이로부터 5억 달러를 유치해 합자법인 ‘도레이새한’을 설립했다.

 

이재관 전 새한그룹 부회장(왼쪽)과 이재찬 전 새한미디어 사장 형제. 사진=비즈한국 DB

 

새한그룹의 사업 30%를 이 합자법인에 넘기는 대형 프로젝트를 통해 부채를 일부 줄였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채권 금융기관들이 자금회수에 나서면서 2000년 새한그룹은 워크아웃에 들어가게 됐다.

 

이재관 부회장은 그 와중에 동생 이재찬 씨의 ‘디지털미디어’ 설립에 1000억 원을 지원하고, 새한건설 설립에 1000억 원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 회사들이 모두 망하면서 고스란히 새한에 빚으로 돌아왔다.

 

그룹이 몰락하는 상황에도 이재관 부회장은 참모들의 구조조정 대안 등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내치는 악수를 뒀다. 엉뚱하게도 수십억 원을 들여 교회를 지어 헌납하거나 아버지 이창희 회장 선영 인근에 수십억짜리 최고급 자택을 짓기도 했다.

 

워크아웃에 들어가기 직전인 1999년 말 새한그룹의 부채는 2조 3900억 원에 달했고, 자회사 지급보증과 자금 지원으로 인한 부채만도 1조 8250억 원이나 됐다. 부채를 탕감하기 위해 이재관 부회장은 작은아버지 이건희 회장을 찾아갔으나 삼성 임원진조차 만나기 힘들었다고 한다.​ 도움은커녕 삼성그룹 금융 계열사들은 ​오히려 ​다른 곳보다 먼저 자금 회수에 나섰다.

 

결국 이재관 부회장은 취임 3년 만에 워크아웃을 신청하고 35억 원 상당의 이태원​ 자택 등 250억 원의 전 재산을 내놓으며 경영에서 퇴진한다.

 

2010년 8월 20일 이재찬 전 새한미디어 사장의 발인식. 사진=비즈한국 DB

 

새한그룹 계열사는 대부분​ 사라졌다. 비디오테이프를 만들던 새한미디어는 GS그룹에 인수돼 코스모신소재로 이름을 바꾸었고, 제일합섬으로 시작한 새한은 일본 도레이에 인수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2003년 이재관 부회장은 분식회계를 통해 불법 대출을 받은 혐의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동생 이재찬 전 새한미디어 사장은 생활고를 겪다가 2010년 8월 스스로 세상을 등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정동민 기자 workhard@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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