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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흥망] '두꺼비 진로만 남기고' 진로그룹과 장진호의 몰락

1988년 회장 취임 후 주류 외 사업다각화에 속도…10년 만에 IMF 맞으며 흔들

2020.06.26(Fri) 12:21:02

[비즈한국] 2004년 4월, ​진로는 1년간의 법정관리 끝에 주인 잃은 기업이 되었다. 주식은 법원의 정리계획안 인가에 따라 전량 휴지 조각이 됐다. 2003년 은행 어음을 결제하지 못해 부도가 난 후 법정관리를 겪는 와중에도 진로는 역대 최고의 영업이익과 시장점유율을 자랑했다. 매출 6900억 원, 영업이익 1930억 원, 국내와 수도권 시장점유율은 55.3%, 92.7%에 달했다. 소주를 마시는 국민의 절반 이상, 수도권에서는 10명 중 9명이 ‘두꺼비 진로’를 찾은 셈이다.​ 국민 소주가 ‘두꺼비 진로’라는 걸 보여주는 모습이다. 

 

당시 롯데그룹, 하이트맥주 등 여러 기업에서 진로를 인수하려 했는데, 결국 2005년 진로는 하이트맥주(현 하이트진로)에 3조 4100억 원에 팔렸다. 진로그룹은 해체됐다. 

 

공병호의 ‘대한민국 기업흥망사’에 따르면 ‘경기가 좋으나 궂으나 사람들은 소주를 마시고 그럴 때면 두꺼비 진로를 찾았고, 1970년대 국내 소주시장 1위에 오른 이후 한 번도 1등을 놓치지 않은 진로는 현금 창출이란 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진 회사’였다. ​그런 진로가 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무모한 다각화’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진로의 소주병 변천사. 사진=하이트진로 제공


#두꺼비 진로와 진로그룹의 탄생

 

진로그룹은 1924년 10월 3일 장학엽 회장이 평안남도 용강군에 설립한 ‘진천양조상회’에서 시작됐다. 진천양조상회는 지속된 적자 속 간판을 내렸다. 이후 장학엽은 동업자 조동식과 1927년 기양양조장을 인수해 상호를 진천양조상회로 바꿨다. 이북에서 사업을 하던 그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월남해서 동화양조, 구포양조를 거쳐 1954년 6월 서울에 올라와 서광주조(주)를 차렸다. 1954년 7월까지 원숭이를 마스코트로 삼았던 진로는 ‘교활하고 음흉한’ 원숭이의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두꺼비로 마스코트를 변경했다. ‘두꺼비 진로’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순간이었다.

 

장학엽 회장은 이어 피혁 회사인 서광산업을 최초의 계열사로 두고 1961년 10월 진로그룹의 회장이 된다. 5년 후인 1966년 서광주조는 진로주조, 1975년에 (주)진로로 상호를 바꾸게 된다.

 

두꺼비 진로가 출시 때부터 1등은 아니었다. 당시는 삼학소주가 전국 시장을 잡고 있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자 진로양조와 삼학소주가 주류업계의 양대 산맥이 됐다. ​1965년 진로가 소주 생산방식을 희석식으로 바꾸며 둘의 격차는 좁아졌고,​ 1967년부터 진로양조가 삼학소주의 매출을 앞서기 시작했다. 진로양조는 1970년 12월부터 2004년까지 소주 시장 1위를 유지했다. 

 

장학엽 회장은 1975년 73세의 나이에 경영에서 손을 뗐는데, 조카 장익용에게 경영을 맡겼다. 장학엽의 아들 장진호는 당시 23세로 회사를 경영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장학엽 일가의 경영권 분쟁은 이때부터 예고된 셈이다. 장진호는 아버지가 사망하기 직전인 1984년 11월부터 이복형인 장봉용과 함께 장익용에게 경영권을 넘겨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장진호는 장익용 몰래 주식을 매입하고 우호지분을 모아 1985년 10월 경영권을 가져왔다. 3년 후인 1988년 장진호는 진로그룹의 회장에 올랐다. 장익용은 피혁회사인 (주)서광, 이복형 장봉용은 진로발효를 맡으며 이들의 분쟁은 마무리됐다.

 

#사업다각화는 결국 그룹 전체를 위기에 빠뜨리고

 

1988년 36세의 나이로 진로그룹 회장에 취임한 장진호 회장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사세를 확장했다. 장 회장은 취임 한 달 만에 탈(脫)주류 선언, 유통업 진출로 사업다각화에 뜻을 보였다.

 

1996년 7월 16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조찬 모임에 참석한 장진호 진로그룹 회장. 사진=비즈한국 DB


당시 진로그룹 계열사는 9개였다. 장진호 회장은 50%에 이르는 주류 식품 부문의 비중을 30%로 낮추고 광고·유통·전선·제약·종합식품·건설·유선방송 등으로 사세를 확장했다. 진로그룹 총매출은 1987년 4100억 원에서 8년 후인 1996년 계열사 24개 도합 3조 5000억 원으로 늘었다. 1996년 진로그룹은 재계 순위 19위에 이름을 올렸다.

 

사업다각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진로는 계열사들에게 출자금, 대여금 등으로 많은 자금을 지원했다. 하지만 2조 원대의 지원에도 신규 계열사의 경영 성과는 부진했다. 1995년 진로인더스트리즈의 부채비율은 6만 %에 달했고, 진로쿠어스맥주와 진로건설은 자본잠식에 빠졌다. (주)진로를 제외한 대부분의 계열사가 경영악화 상태였다.

 

무모한 다각화의 결과를 소주 판매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1997년 초부터 진로의 자금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진로그룹의 자기자본비율은 4.3%밖에 되지 않았다. 1997년 396억 원의 어음을 결제하지 못해 부도 처리됐다.

 

1998년 9월 기준으로 (주)진로는 출자금 1208억 원, 대여금 1조 3262억 원, 지급보증금 7482억 원을 계열사에 지원한 상태였다. 총합이 2조 1952억 원에 달했다.

 

부도 이후 채권단에게 파산을 예방하기 위한 화의 인가 결정을 받았지만, 2003년 4월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됐다. 이후 2005년 10월 하이트맥주에 매각됐다. 진로그룹의 계열사들은 다른 회사에 인수되거나 청산절차를 밟으며 뿔뿔이 흩어졌다.

 


2003년 장진호 회장은 5696억 원 사기 대출, 비자금 75억 원 횡령 혐의로 구속됐다. 2004년에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5년을 받고 풀려난 그는 2005년 캄보디아로 도피해 ‘찬삼락(Chan Samrach)’으로 살았다.

 

몰락 이후에도 장 회장은 사업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았다. 은행, 부동산, 카지노 등 여러 사업에 손댔다. 하지만 캄보디아에서도 탈세 문제가 불거져 2010년 중국으로 도피한다. 중국에서도 게임업체와 더불어 다양한 사업에 투자하고 현지인 법인을 통해 회사를 운영했지만 2015년 4월 3일 중국 베이징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생전의 야심에 비해 허망한 죽음이었다.

정동민 기자 workhard@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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