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비즈한국 BIZ.HANKOOK

전체메뉴
HOME > Story↑Up > 엔터

[올드라마] 만화 같은, 그래서 더 설득력 있는 '신입사원'

스펙만능주의 비웃는 통쾌한 재미…비현실적 설정과 현실적 전개가 주는 묘미

2020.04.24(Fri) 15:20:33

[비즈한국] 어릴 적만 해도 꿈을 말하라면 대통령, 과학자, 선생님을 말하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19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은 그랬다). 중학생을 넘어 고등학생쯤 되면 슬슬 ‘희망 직업이고 나발이고 인 서울 대학만 갔으면 좋겠다’로 꿈이 소박해진다. 천신만고 끝에 대학에 입성해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는 ‘안정적인 회사의 정규직’으로 꿈이 바뀐다. 드라마 ‘신입사원’의 강호(문정혁)도 그랬을 것이다.

 

2004년 비극으로 점철됐던 ‘발리에서 생긴 일’을 썼던 이선미, 김기호 부부 작가가 그다음으로 선보인 ‘신입사원’. 그룹 신화의 에릭이 본명 문정혁이란 이름으로 ‘불새’에 이어 주연을 맡은 작품으로, 에릭의 매력이 단연 돋보인다. 사진=MBC 홈페이지

 

2005년 방영한 ‘신입사원’은 만화 같은 상상에서 출발한다. 세계적 수준의 대기업에서 전산착오로 빵점 응시자가 수석 합격자가 된다는 상상. 주인공 강호는 공부 빼고 여러 스포츠와 잡기에 능한 인물이지만 그놈의 공부를 못해서 ‘스펙’이 매우, 무척 달린다. 그의 꿈인지, 그가 안정적인 회사에 취직하길 바라는 부모님의 꿈인지 모호하지만 어쨌든 강호는 직장인이 되기 위해 하릴없이 여러 회사에 원서를 내고 있는 스물아홉 살 청년 백수다.

 

집안에서의 구박과 세계적인 대기업 LK에 특채로 입사하는 잘난 동창 이봉삼(오지호)의 멸시에 자존심이 상한 강호는 ‘떨어지더라도 대기업에서 떨어지는 게 낫다’는 배짱으로 LK에 원서를 낸다. 그런데 삼류대 사회체육과를 간신히 졸업하고 영어라곤 한마디 입도 못 떼는 강호가 서류 전형을 통과하더니, 필기시험에 면접까지 패스하고 만다. 그것도 수석 입사다! 강호 자신이 봐도 어이가 없는 상황인데, 믿기지 않아 찾아간 면접 담당 전무는 ‘자네야말로 21세기가 원하는 인재’라며 확신을 준다.

 

고등학교 동창인 강호(문정혁)와 이봉삼(오지호)은 각기 LK 공채 수석과 특채로 입사하며 사사건건 부딪친다. 봉삼은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악역 포지션이었지만 알코올중독 아버지로 인한 불우한 가정사, 학창시절 생각 없이 자신의 도시락을 뺏어 먹던 강호에 대한 반감 등으로 동정의 여지가 없지 않은 캐릭터다.  사진=MBC 홈페이지

 

이 어처구니없는 결과는, 첫째는 실수로 강호의 서류가 합격자 쪽으로 옮겨진 덕분이고, 면접 담당을 맡은 김 전무(이기열)가 야심 차게 도입한 전산 시스템이 필기시험 빵점인 강호의 답안지를 만점으로 잘못 인식했기 때문이며, 당연히 강호가 만점 응시자라 생각한 면접관들이 강호의 모든 점을 높은 패기로 봐주며 프리패스를 주고, 결정적으로 자신이 도입한 시스템의 실수를 자인할 수 없는 김 전무(이기열)가 필사적으로 사실을 은폐했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LK에 입사한 강호는 (공부 외에) 오랜 시간 갈고 닦은 자신만의 무기와 타고난 운으로 ‘스펙’ 짱짱한 ‘LK장학생’ 이봉삼을 질투심에 사로잡히게 할 만큼 탄탄대로를 겪는다. 연수원 첫 미션인 LK 제품 판매부터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격투기 선수를 제안한 일본의 마루야마 회장을 우연히 만나 판매는 물론 2000세트 주문까지 받아내고,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는 연수원 생활에서도 타고난 밝은 성격으로 동기들과 친해져 우정상을 받는다. 김 전무 일당이 강호를 제 발로 나가게끔 일부러 어려운 미션을 던져줘도 강호 특유의 성격과 운, 주변인들의 도움으로 해결하며 도리어 이름을 드높이는 식이다.

 

고졸 계약직 사원 이미옥(한가인)과 LK 계열사 사장 딸인 서현아(이소연). 처음에는 이봉삼을 사이에 두고, 나중에는 강호를 사이에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다. 일에 대한 책임감과 열정은 미옥이 뛰어나지만 회사에서는 ‘스펙 위의 스펙’인 강력한 ‘빽’을 둔 현아의 편만 든다. 사진=MBC 홈페이지

 

이런 일련의 상황들은 만화적 상상력의 드라마니까 가능하다. 하지만 ‘신입사원’은 그 ‘드라마니까 가능한 포인트’가 정말 드라마라서 가능한 것인지 묻는 데 묘미가 있다. 강호의 수석 입사 전말을 어떻게든 숨겨야 하는 김 전무가 대외적으로 강호에 대해 ‘학벌이 실력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며, 우리 회사는 오로지 사람에 집중해 21세기형 인재를 뽑았다’고 말하는 걸 보라. 너무나 맞는 말이라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고등학교 때 성적이 좋아 좋은 대학을 갔다고, 좋은 대학에서 높은 학점과 스펙을 쌓았다고 그것이 곧 일터에서의 실력과 성공으로 귀결되는 건 아니니까.

 

이봉삼과 서현아(이소연), 그리고 문성호 과장(김세준)이 그 증명이다. 봉삼은 특채로 입사할 만큼 우수하지만 송 이사(김일우)에게 “자네 같은 범생이들의 문제가 뭔지 아나? 어떤 과제가 주어졌을 때 너무 교과서적으로 다룬다는 거야”라고 할 만큼 무엇이든 배운 대로 접근하고 창의적으로 일을 풀어나가는 데 약하다. LK 계열사 사장 아버지를 둔 덕에 낙하산으로 입사했지만 좋은 대학을 나온 고스펙자임은 분명한 서현아 또한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창출해내지 못한다. 반면 변변치 않은 대학 출신에 소위 ‘줄’을 서지 못한 문성호 과장은 출중한 기획 실력을 지녔음에도 승진에 실패해 만년 과장에 불과하다.

 

강호와 봉삼의 동창인 주성태(정진). 봉삼보다 더 공부를 잘했고 일류대를 들어갔지만, 어쩐 일인지 입사시험에는 연거푸 낙방한다. 공부만 잘한 실패한 모범생의 전형인 셈. 자살할 거라던 애​초 기획과 달리 성태는 도박의 수렁에서 빠져나와 LK에 입사한다. 사진=드라마 캡처

 

이봉삼의 옛 애인이자 강호와 러브라인을 이루는 상고 출신 계약직 사원 이미옥(한가인)은 어떤가. 허드렛일일망정 자신이 맡은 일에서는 깔끔하다는 평을 받으며, 퇴근 후에는 영어 공부에 매진하고, 계약직에서 쫓겨난 뒤 우여곡절 끝에 다시 파견직으로 돌아와 화장품 리서처로 일할 때도 시킨 일 외에 업그레이드한 자료를 따로 만들 만큼 자신의 일에 열정적이다.

 

좋은 회사에 입사하고자 성실히 공부하고 ‘스펙’을 쌓아온 이들의 시간과 노력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내 주변에도 대졸자와 고졸자의 연봉 및 처우가 다른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지인들이 있다. 그들이 말하는 ‘보상심리’가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정말 그게 옳을까? 전공과 상관있는 직장에 취업한 것이라면 또 모를까, 그저 입사를 위한 ‘스펙’ 때문에 크게는 50%포인트나 벌어지는 연봉 격차나 정규직과 계약직으로 나뉘는 게 옳은 걸까?

 

방영 당시에도, 지금 봐도 짠내 나는 문성호 과장(김세준). 사내 기획안 1위를 차지할 만큼 실력을 갖췄고, 강호와 달리 아무 문제없이 정식 입사했지만 소위 삼류대 출신에 정도를 걷는 성격 때문에 윗사람들의 눈에서 벗어나 승진을 못하던 인물. 사진=드라마 캡처

 

‘신입사원’은 분명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만화적인 상상력으로 중무장한 드라마다. 하지만 일류대 출신이라 오히려 중소기업에서도 탈락하며 도박에 빠지는 강호의 친구 주성태(정진)나, 실력과 성실성을 갖췄음에도 강호와 달리 운이 좋지 못해 결국 산업스파이로 돌변하는 문 과장 같은 현실에 기반을 둔 캐릭터를 선보이며 곱씹을 여지를 남겼다.

 

성태는 결국 1년 뒤 강호가 있는 LK에 입사하고, 한때 질투에 사로잡혀 강호를 궁지에 몰아넣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봉삼도 반성하며, 능력을 알아봐준 상사 덕에 미옥은 LK 화장품 점장이 되어 승승장구하지만, 드라마 중후반까지 강호를 북돋아주고 훌륭한 멘토 역할을 했던 문 과장은 사라지고 만다. 못내 씁쓸하다.

 

공부도 영어도 못했지만 한번 다짐하면 어떻게든 승부를 내는 근성, 각종 만화와 무협지 등에서 섭렵한 넓고 얕은 생활지식, 온갖 스포츠와 잡기는 물론 댄스까지 뛰어난 다재다능한 강호. 모르는 건 많지만 이유없이 계약직에서 쫓겨난 미옥의 1인 시위를 서슴없이 도울 만큼 옳고 그름에 대한 줏대는 분명하다. 사진=드라마 캡처

 

21세기에 접어든 지 벌써 20년째다. 지금 기업들은 잠재력 충만한 21세기형 인재 강호나 성실한 미옥, 문 과장 같은 이들을 알아보고 있을까? 글쎄, 글쎄올시다. 어쩌면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을 몰라주는 회사를 버리고 죄다 공무원 시험장으로 몰려갔을 수도 있겠다.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핫클릭]

· '아직 날개도 못 폈는데' 신규 LCC 4월 도산설 현실화되나
· [올드라마] '시티홀', 우리가 꿈꾸는 정치인은 드라마에만 있을까
· [올드라마] 인생이 너무 평온하고 지루할 때, 명품 복수극 '부활'을 보라
· TV만 켜면 장나라가 등장하던 시절 '명랑소녀 성공기'
· [올드라마] 집콕의 시대, '보고 또 보고'를 또 보는 이유


<저작권자 ⓒ 비즈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