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 아닌 둘레라서 더 좋은 봄 마중, 지리산둘레길

[비즈한국] 지리산둘레길이 열린 지도 10년이 지났다. 그간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었다. 묻고 따지기 좋아하는 세상 속에서 직선만 고집하지도, 단도직입적으로 묻지도 않고, 그 이름처럼 둘레둘레 돌아가는 지리산둘레길은 푸근하다. 배낭에 이것저것 잡동사니를 챙겨 마음 편안한 불편의 길로 들어선다. 편리한 불안을 안고 사는 것에 지쳤을 무렵, 지리산둘레길이 말을 걸어왔다. 지리산둘레길 22개 구간 중 3코스인 남원과 함양을 잇는 인월-금계 구간을 걷는다. 잠시나마 중심이 아닌 언저리를 탐한다. 기꺼이 중심 아닌 둘레의 미학을 좇는 길, 지리산둘레길이다.

지리산둘레길 22개 구간 중 3코스인 남원과 함양을 잇는 인월-금계 구간을 걷는다. 잠시나마 중심이 아닌 언저리를 탐한다. 기꺼이 중심 아닌 둘레의 미학을 좇는 길, 지리산둘레길이다. 사진=이송이 기자

2008년에 처음 열린 지리산둘레길은 지리산을 따라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라는 자그마치 3개의 도를 망설임 없이 이어 나간다. ‘화개장터’ 노래 가사처럼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것이 아니라 은근슬쩍 넘나든다. 두런두런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도 좀 보라고 마을길을 휘돌아 간다. 둥그렇게 환형으로 이어진 그 길을 걸으며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마을과 숲이 만난다.

지리산둘레길은 남원시,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구례군이라는 5개의 시군과 21개 읍면, 120여 마을을 잇는다. 295km, 22개 구간의 장거리 도보길이다.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을 무시로 훑는다. 둘레길은 안간힘을 써가며 오르고 내리는 지리산 등반과는 달리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산을 끼고 그 주변을 넉넉하게 감싸 안는다. 지리산을 품고 싶으나 망설이는 자들의 소망을 쉬이 들어준다.

지리산둘레길은 남원시,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구례군의 5개 시군과 21개 읍면, 120여 마을을 잇는다. 295km, 22개 구간의 장거리 도보길이다. 사진=이송이 기자

# 지리산 첩첩이 다랑이 논 겹겹이, 상황마을과 등구재 쉼터

지리산둘레길 3코스, 해발 400m 고지대에 있는 상황·중황마을의 다랑이 논이 편안하다. 깊은 산골에선 다랑이 논이 흔하다. 경사가 가파르니 윗마을에도 아랫마을에도 자연스럽게 다랑이 논이 펼쳐진다. 상황과 중황마을은 거북이 등을 닮았다는 해발 650m의 등구재를 오르고 내리는 길에 있다. 마을을 잇는 등구재는 크게는 전라북도와 경상남도를, 작게는 산내면과 마천면을 이어주는 옛 고개다. 경계이자 이음새인 등구재를 사이에 두고 윗마을인 상황마을은 전북이고 아랫마을인 창원마을은 경남이다.

깊은 산골에선 다랑이 논이 흔하다. 경사가 가파르니 윗마을에도 아랫마을에도 자연스럽게 다랑이 논이 펼쳐진다. 사진=이송이 기자

다랑이 논은 겹겹이, 그 앞으로 멀리 보이는 산자락도 첩첩이다. 사시사철 변함없는 최고의 전망이다. 산자락에 겹겹이 자리한 다랑이 논의 사계는 햇볕을 받아 처연하고 찬란하다. 양지바르고 토질이 좋아 이 근처에서 가장 좋은 쌀이 생산되는 논이기도 하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도시의 여행자 눈에는 시골마을이 마냥 평화롭게만 보인다. 마음의 안식이 절로 찾아올 것 같다. 하지만 당사자와 구경꾼 사이에는 언제나 냉혹한 간극이 존재한다. 구경꾼이야 아름답게 보건 말건 다랑이 논은 쉽지 않은 일터다. 하지만 투박한 옷을 입고 자글자글 검게 주름진 농부의 얼굴에는 모자람은 있지만 불안은 없어 보인다.

이 고개에는 쉼터도 여럿이다. 상황마을에서 가장 전망 좋은 곳에 등구령 쉼터와 등구재황토방 쉼터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등구령 쉼터에서는 당장의 주전부리뿐 아니라 된장이나 고추장, 청국장 등도 판매하고 맞은편 등구재 황토방 쉼터에서는 산채정식과 표고버섯전, 도토리묵, 파전, 식혜, 오미자차, 각종 계절 나물을 맛볼 수 있다. 멀리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고 가까이 다랑이 논을 마주한 이곳 쉼터들은 걷는 이들에겐 소소한 낙원이다.

마을을 지나고 임도를 지나 산길로 들어선다. 지리산둘레길에서 숲길로 진입하는 경로는 대개 비슷하다. 등산을 할 때처럼 바로 숲으로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 마을이 끝나는 길에 임도가 있고 임도가 끊어지면 숲길이 이어진다. 사람 사는 곳을 거쳐 산으로 올라선다. 그 길에서는 때때로 묘한 고독이 인다. 즐길 만한 고독이다.

마을이 끝나는 길에 임도가 있고 임도가 끊어지면 숲길이 이어진다. 사람 사는 곳을 거쳐 산으로 올라선다. 그 길에서는 때때로 묘한 고독이 인다. 즐길 만한 고독이다. 사진=이송이 기자

겨울 끄트머리의 지리산둘레길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대신, 자연을 더 가까이 느낀다. 다람쥐도 꿩도 고라니도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나무와 땅에 박힌 풀뿌리들도 더 자세하게 보인다. 새소리도 바람소리도 어쩐지 또렷하게 들린다. 쌀쌀한 날에 눈은 더 맑게 깨인다. 어떠면 자연의 무수한 소리들과 대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부푼다. 어쩐지 그네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은 동심이 움튼다.

# 겨울끄트머리, 산촌마을의 안온한 시간들

재 너머 마을, 다시 재 너머 마을이다. 산촌마을의 진수, 그야말로 깡촌이다. 재는 깊고 더불어 재 너머 마을도 깊다. 사람들은 여전히 순박하다. 산보다 빌딩이, 숲보다 네온사인이 더 익숙한 도시인이 산촌길을 묵묵히 걷는다. 그렇게 걷고 걷고 또 걷다보면 다시 도시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산촌의 무던한 시간이 몸에 밴다.

숲보다 네온사인이 더 익숙한 도시인이 산촌길을 묵묵히 걷는다. 그렇게 걷고 걷고 또 걷다보면 다시 도시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산촌의 무던한 시간이 몸에 밴다. 사진=이송이 기자

구불구불한 섬진강과 지리산둘레길 곁엔 갤러리도 있고 카페도 있고 시장도 있고 쉼터도 있다. 있을 건 있고 없을 건 없는 게 시골살이라지만, 둘레길에는 시골마을엔 없을 것 같은 것들도 있다. 무작정 걷기만 하는 게 아니라 문화를 누리는 둘레길 여행이다.

걷다가 산중 갤러리 ‘길섶’을 만난다. 갤러리이자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사랑방이다. 너와를 얹은 45평의 공간에 50여 점의 지리산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숲길 중간에 둘레길을 살짝 벗어나 갤러리 길섶으로 가는 길이 나 있다. 승용차로도 진입이 가능해서 게으른 여행자에게도 지리산 전망을 쉽게 보여준다. 민박도 되니 꼭 지리산둘레길을 걷지 않아도 하루 쉬어가기 좋다.

많은 지역을 아우르는 지리산둘레길에는 장도 다채롭다. 3·8일인 인월장을 중심으로 지리산둘레길이 포진해 있는 인근 지역에서는 여러 5일장이 선다. 1·6일은 운봉장, 2·7일은 함양장, 4·9일은 남원장, 5·10일은 마천장이다. 그 중에서도 3코스에 있는 인월장은 예부터 인월뿐 아니라 운봉, 산내, 마천, 아영을 어우르던 큰 장이었다. 전문적인 장사꾼도 있지만 장날이면 마을 사람들도 이것저것 조금씩 수확물을 내다 판다. 이런저런 상권에 밀려 시골장날도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장날의 국밥 한 그릇은 한 끼 이상의 감흥을 준다.

산촌마을에서 민박을 할 수 있다. 1인당 5000원을 내면 시골밥상을 차려준다. 사진=이송이 기자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며 편안하면서도 힘겹고, 익숙하면서도 생경한 이 길이 꼭 사람 사는 모양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평이하다가도 가팔라지고 힘겹다가도 쉴 틈을 주는, 지루하듯 스릴 넘치는 둘레의 길. 다채롭게 펼쳐지는 시골길과 숲길은 특별하지 않아도 저마다 나름의 멋을 낸다. 특별하지 않아서 정겹다. 호들갑스럽지 않아 푸근하다. 누구에게나 쉬이 접근을 허락하고 함께 어울려보자 손 내민다.

“아래로부터 위를 바라보는 것 또한 높은 곳을 올라 아래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필이면 험준한 곳을 지나 뾰족한 바위를 오른 뒤에야 아름다운 경치를 보겠습니까?” 조선시대 선비 양이영의 말이다. 지리산둘레길이 보여주는 둘레의 풍경은 그 어느 고산의 풍경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는다.

지리산둘레길을 함께 걸은 지인은 “걷기만큼 가슴 뿌듯하게 휴일을 즐길 수 있는 일이 또 있겠느냐”며 걷기예찬에 빠졌다. 시속 1.3km, 아이나 부모님과 함께 걸을 수 있는 속도. 시속 2.5km, 성인이 주변 경관을 느긋하게 감상하며 여유 있게 걷을 수 있는 속도. 시속 100km로 달리던 정신에 한 번쯤 브레이크를 건다.